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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초원에서의 단상
Level 10   조회수 142
2024-10-25 15: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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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초원에서의 단상

공갈렙 대표



  올 8월 31일부터 9월16일까지 중앙아시아 3개국을 다녀왔습니다.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에서 필드 선교사들, 현지인들과 보냈던 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중앙아시아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지만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곳에 가면 만날 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현지인들의 환대 문화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이미 한국에 와 있는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그곳 음식을 자주 접해서 그런 것일까? 여하튼 ‘낯선 친숙함’이라는 모순을 안고 그 나라들을 방문했습니다. 세 나라는 유사하면서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 나라의 3국 3색을 스케치하며 그 기간 느꼈던 선교적 단상을 나누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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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슈켄트의 서울 거리


  이번 방문을 통해 우즈베키스탄이 유목문화가 주류인 중앙아시아에서 농경문화로 전환한 지 오래된 국가라는 것, 그래서, 종교적 전통이나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국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항공을 탔을 때 기내에서 제공되는 항공사 월간지에 파리올림픽 특집 기사가 실렸습니다. 8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역사상 가장 큰 수확을 얻은 올림픽임을 알리고, 각각의 메달리스트의 상세 정보 또한 사진과 함께 공개했습니다. 거기에는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도 있었습니다. 그 여자 선수의 기사를 눈여겨봤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서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라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올림픽 결과는 국가의 자부심을 올리는 기회였습니다. 그런 자부심 세우기에 여성이 들어갔다는 것이 큰 변화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민족주의와 종교적 우경화의 추세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점점 강화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과 함께 방문한 최근의 핫(hot)한 거리는 서울(Seoul)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쇼핑가였습니다. 한류가 이미 우즈벡 사람들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한국 기업의 투자도 활발하다는 말을 듣고는 이곳이 한국인을 환대하는 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어 교육센터를 운영하는 선교사님의 사역이 매우 시의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의 땅에 사람이 부족합니다. 현지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게 제도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그루터기 현지교회와 동역할 사람들이 너무 필요합니다. 한국인을 환대하는 그 땅에 우리는 여전히 보낼 사람이 없는 이 아이러니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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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초원


키르키스스탄의 서북부에 위치한 탈라스는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고선지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아랍 군대와 전투를 벌여 패배했던 곳입니다. 그때의 패전으로 중앙아시아가 중국의 영향력에서 아랍 세력의 영향력 아래로 넘어가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땅이 지금은 작은 변방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 수도 비슈케크에서 약 7시간 정도 구불구불한 산을 넘어가야 하는 그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엔 키르기스인들의 국민 영웅 마나스의 무덤이 있고, 그를 기리는 박물관 또한 있습니다. 오랫동안 키르기스인들만의 국가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1991년 이후의 독립된 키르기스스탄의 국가 정체성 세우기는 국가의 우선된 프로젝트였습니다. 정부가 마나스를 영웅으로 높이고, 그의 치적을 노래한 대서사시 <마나스>를 널리 알리는 것을 통해 국가 통합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마나스>는 기원이 확실하지 않은 오랜 시간 동안 구전 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나 인도의 <라마야나>, <마하바라타>보다 긴 이 대서사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서 노래하는 사람은 특별히 ‘마나스치’라고 합니다. 전쟁 영웅의 스토리가 담긴 마나스치의 공연은 마을 곳곳마다 키르기스인들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데 활용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통 문화예술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나스치는 주술사의 역할도 하기에 키르기스인들의 민간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키르기스적인 문화, 신앙 전통이 어떻게 복음을 담아내는 구속적 유비로 연결될 수 있을지 고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적용하는 선교사 그룹은 극히 소수입니다. 앞으로 이런 연구에 대한 지원과 독려를 위해 한국본부에서 역할을 담당할 게 있음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미 계획 중인 온/오프라인 자료실 구축과 선교사 재교육을 통한 지원 등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탈라스엔 한 선교사 가정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선 유일합니다. 다른 국적의 선교사도 남미에서 온 두 가정뿐입니다. 그 도시에 거주하는 선교사는 이들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비서구 선교사들이 더 많이 활동하는 세계 기독교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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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슈케크의 현재와 미래


  비슈케크엔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사역자들이 꽤 많습니다. 숫자가 많기도 하지만 선교사마다 각기 다른 사역들을 진행하고 있어서 가정마다 따로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주의 체류 기간 동안 만났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신실하게 일터와 삶터의 일상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30년의 긴 사역 경험자부터 이제 막 1~2년이 지난 초임 사역자까지 경험치가 다양하고, 직업이나 사역의 성격이 또한 다양했습니다. 방문할 때마다 함께 만나는 현지인 사역자, 성도들 덕택에 그 나라에 대한 이해와 사역적 필요를 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키르기스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더 가난하고 순박한 사람들입니다. 이슬람 문화가 주변국들보다 강하지 않고, 정부 또한 타종교에 대한 규제가 크지 않습니다. 여러 외국인 사역자들이 그 나라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이런 환경이 한몫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선교사들이 편하고 쉽게 사역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이 복음의 수용성이 강하다는 것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정교회 공동체를 돌보는 몇몇 선교사 가정이 마침 제가 방문한 시점에 공동체를 뛰쳐나간 지체들이 여럿 있었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듣고 함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한 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지난 20~30년의 사역의 결과로 비슈케크에 복음의 접촉점이 많아지고 있지만 결국 이들의 토양에 맞는 현지인 주도의 예배와 신앙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에만 현지교회 뿌리 깊은 나무로 자랄 수 있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 주도의 여러 프로젝트와 사역이 있으나 이들이 떠난 후에도 지속 가능하고, 재생산이 일어나는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면 결국 그 사역의 의미가 퇴색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역의 시작부터 물적, 인적 구성이 현지화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언급한 이곳 문화에 접목한 구속적 유비를 찾는 것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기독교 전통을 발견하고 공유하며, 그것이 현지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역사적 유산인지, 새롭게 바꿔야 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곳에서 더 자세히 알게 된 동방기독교의 흔적은 과거 이슬람화가 되기 이전 중앙아시아의 현지화된 기독교 전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배움 또한 선교사의 현지 문화 이해와 연구자로서의 자세를 도전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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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의 남은 자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는 비슈케크보다 발전된 대도시입니다. 이곳도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편의점이 입점해 있고, 한국 식당이 종종 보였습니다. 대학엔 한국어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한국 정부와 관련 한국어교육원이 따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키르기스스탄보다 한류의 규모가 훨씬 컸습니다. 선교사님도 한국어를 가르치며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삶으로 전하고 계셨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열매가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도 우즈베키스탄처럼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한 곳입니다. 

몇몇 남은 자들이 꾸준히 한 영혼씩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몇 년을 그냥 한국어 교수와 학생 관계로 있다가 최근에 성경 공부를 시작한 한 학생 이야기를 하는 선교사님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깊게 뿌리박힌 그들의 문화에서 복음은 서서히 그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끈기와 인내, 그 과정에서 보인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고백이 가능했을 겁니다.




남은 숙제


  우리는 그들을 잘 알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며 선교의 동반자로 여기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서 제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복음의 그릇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성령님을 참으로 의지하며 사역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내하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믿음의 순종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돈과 세력을 신뢰하는가? 참으로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맴도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오니 로잔대회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더해진 더 다양한 질문들로 인해 9월 한 달은 매우 배부른 달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씩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위의 질문들을 계속 되새기며, 각자의 위치에서 어떠한 답과 적용점을 찾아야 할 지 고민하고 씨름하며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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