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서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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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서브의 몸이 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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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3 18: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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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서브의 몸이 된다는 의미 


조샘 대표




펠로우라는 이름은 어디서? 


인터서브는 지난 수년 동안 거버넌스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선교단체의 몸을 구성하는 주체는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돕는 재정 후원자들이나 교회 목회자 중 일부가 단체의 "이사"라는 이름으로 돕는 구조였다. 그 분야는 주로 재정 쪽으로, 대부분 멤버라기보다는 재정 후원자의 기능을 하는 셈이었다.


변화를 이끌 방향은 "Life As Mission"이었다. 현대의 선교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나 선교단체가 아닌, 현지의 성도들과 지역교회의 선교적 실천이 중심에 서야 함을 요구해왔다.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 성도들의 선교적 삶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등장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교사가 아닌 사람들을 인터서브의 몸으로 초청하기로 했다. 


인터서브는 선교사를 파트너라고 부른다. 이는 과거 식민주의 시대, 선교는 시혜적이고 문화 전수적으로 이뤄지며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현지인들과 교회들을 도와주는 형태였다. 선교사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한국 교회와는 달리, 많은 나라에서 “Mission 선교”는 자신들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제국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 1986년 우리 단체는 과거의 Bible and Medical Mission Fellowship에서 International Service Fellowship (줄여서 Interserve)으로 이름으로 바꾸었다.  선교사라는 명칭 역시 1970년대부터 현지인들과 교회들의 보조자가 되자는 의미에서 “파트너”로 변경하였다.


이제 우리와 함께 몸을 이룰 보통의 성도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는 큰 고민이었다. 이미 “이사”라는 타이틀을 받은 분들이 100여 명이 있었다. 그 중 절반은 사실상 우리와 소통이 되지 않는 분들임에도 그 직함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이사는 원래 거버넌스에서 정책을 세우는 소수의 전문가들을 말한다. 그런데도 한국 선교계에서는 이사가 일종의 명예직으로 남발되는 면이 있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이사는 재정 후원자일 뿐, 정책 수립에 관여하지는 않았기에 이번 기회에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이사회에서는 거버넌스 TFT를 구성했고 수많은 토론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안 돼요. 이사라는 직함이 이 체면 문화에서 얼마나 중요한데..."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만약 이사를 정리하고 새롭게 이름을 한다면 어떤 것이 적절할까? 멤버나 회원이라는 말은 왠지 가벼워 보였다. 단순히 재정 후원자가 아니라 총회와 공청회에 참석하여 몸을 이루고 다양한 기능에 참여할 회원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TFT에서 의논하다가 과거 우리 단체는 1957년에 선교회 Mission이라는 이름 대신에 펠로우십 Fellowship이라는 이름으로 단체 이름을 바꿨던 기억이 났다. 당시 선교회라는 이름이 갖는 수직적이고 성과 중심적 이미지가 아니라, 함께 한 구성원들의 개인성을 존중하고 동등성을 표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함께 몸을 이룰 성도들을 펠로우 Fellow라고 부르면 되지 않겠나? 긴 논의 끝에 지혜가 떠올랐다. 선교사가 아닌 다른 직업이지만, 삶의 자리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가며 인터서브의 가치와 목적에 동의하여 함께 몸을 이루길 원하는 동료들을 펠로우로 부르기로 했다.


 

여전히 이 명칭과 역할의 변경이 과연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었다. 2021년부터 2022년 상반기까지 총 15번의 크고 작은 공청회를 기존 이사들과 파트너들과도 나눴다. 놀랍게도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런 뜻이라면 기꺼이 펠로우로 전환하겠다고 동의하였고 여름 총회에서 정관을 거의 만장일치로 수정할 수 있었다. 계속 관계를 맺어 오던 50여 분이 펠로우로 전환하였다. 많은 분들이 담백하게 이사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고, 작년 하반기에 신임 펠로우들을 초청하며 전체 숫자는 오히려 두 배로 늘었다. 기존의 이사회는 소수의 선출직 이사로 구성되어 정책 수립과 리뷰에 집중하고 올여름 이사 선거가 있을 예정이다. 


이 과정 전체가 사실 6년간 조금씩 이뤄졌다. 단순한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멤버들이 이해하고 함께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더 감사한 일이다. 



또 다른 교회인가?  


지역교회와 선교단체는 무엇이 다른가? 멤버가 된 분들 모두 지역교회의 성도들이다. 인터서브의 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현대 복음주의 선교의 틀을 마련한 랄프 윈터가 관찰했듯,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두가지 구조를 갖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지역교회와 교단 구조가 있다. 선교학적으로는 모달리티modality라고 부른다. 이 구조는 지역 속에 뿌리를 내림으로 모든 다양한 성도들을 담아야 하는 구조로 일관성과 제도성이 강하다. 시작 자체가 초대교회의 초기에, 이단들의 도전 가운데 바른 신앙을 지켜나가면서 제도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의회들이 모이다가 교단이 형성되었다. 질서, 바른 교리, 교육, 예배, 모든 이들을 담는 수용성, 연합 등이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성격 중 "보편성"catholicity이 강조된 교회의 표현이다.


그러나, 사실상 모달리티보다 앞선 교회의 또 다른 구조가 있었다. 제도이전에, 선교와 복음증거를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들이 로마의 다양한 도시들 가운데서 풀뿌리처럼 생겨났던 것이다. 이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 제도화된 교회를 피해서 사막에서 혹은 변방에서 생겨나 수도원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를 소달리티sodality라고 부른다. 수도원 운동 중에는 칩거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필사하거나 공부하는 그룹도 있었으나, 변방에 땅을 개척하고 야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도심 속의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흐름도 있었다.


이 교회적 표현은 개척성과 실험성이 강하다. 새로운 민족과 문화 그룹 등으로 나아간다. 지역교회가 그 보편성으로 담을 수 없는 소외된 이들에게 가려는 선교의 목적을 중심으로 모인다. 수도원 운동의 정신이 해외 선교단체나 도시빈민운동, 대학생 선교단체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모달리티와는 달리 목적과 가치가 공동체의 중심에 있기에, 그 멤버십의 허입이나 유지에서도 이 목적이 우선하기에 멤버십이 까다롭다. 개척, 섬김, 희생, 복음증거, 돌파, 변혁을 향한 헌신이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성격 중 "사도성"apostolocity이 강조된 교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두 가지 방향성과 구조는 완벽히 분리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건강한 교회는 이 양 측에서 균형을 잡는다.  최근 들어서 미션얼Missional 교회의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 양쪽의 밸런스에 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특별히 모달리티의 교회들, 지역교회들이 사도성을 찾으려는 노력이라고 본다. 한국 교회는 원래부터 교단성이 약하고 각 교회들의 독립성과 개척성이 강한 미션얼의 정신이 있었다. 다만, 교회의 대형화와 더불어 이 부분이 약해진 것이 현실이다. 모든 이들에게 무난한 메시지를 전하고 다양한 사람을 한 제도 안에 담으려는 제도적 동질화Institutional isomorphism현상이 생기며 교회들이 크기만 다를 뿐 다 비슷비슷해졌다. 바라기는 한국 교회가 개척정신을 회복하여,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더 다양해지고 실험적이길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 같은 단체가 필요 없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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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서브의 몸이 된다는 의미는?


그러면, 이런 소달리티적인 공동체의 멤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가치와 목적"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이다. 정기적으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함께 모이고 기도하고 의논하고 정리한다. 그리고 일단 정리된 방향성에 우리는 온전히 헌신한다. 현재 우리의 부르심은 "아시아와 아랍의 이들과 함께하며 총체적 선교와 교회와의 파트너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인터서브의 몸이 된다는 것은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음 말한다. 약속된 일정 기간, 이 일에 우리를 드리기로 한 헌신을 말한다. 이 가치와 목적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회사를 볼 때 많은 사학자들은 16세기 이전에 이미 종교개혁이 있었다고 본다. 그건 10세기 제도적 로마교회가 재정적으로 성적으로 타락해 있을 때, 수도원 운동의 사제들이 교황으로 들어왔던 흐름이었다. 그레고리 개혁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다시 타락하여 교회 전체가 쇠락하던 십자가 운동의 광기가 끝나가던 13세기 아씨시에서 프란시스코가 등장하여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작은형제회가 구성되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로마교회가 또다시 타락의 사이클에 들어갔던 15세기와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수도원 운동이 완전히 제도적 교회 밑으로 들어가서 그 빛과 소금 됨을 잃어버림으로 인해서 로마교회는 자체적으로 개혁할 힘을 잃어버렸다. 앞서 말했던 내부적 개혁들이 소중하기는 했지만, 수도원 운동이 제도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제도적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고 도울 것이다. 그러나, 특정 교회나 개인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난하고 작고 약해도, 우리 자신을 지탱해야 한다. 1936년 유럽이 국가주의의 광풍에 휩쓸릴 때, 당시 초교파 단체인 인터서브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던 영국 국교회가 자신들 교단으로 귀속할 것을 요구했다. 국제 이사회는 함께 의논하고 초교파단체로 우리를 처음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국가가 나뉘어 싸우더라도 교회 공동체는 국가와 이념을 뛰어넘어서 하나가 되어야 했다. 성공회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컸던 상황 속에서 이 결정은 위험했고,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문을 닫았을 것이다. 이 역사를 기억함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의 존폐보다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주신 "가치와 목적" 이 더 소중함을 기억하자. 우리가 서로 돌보고 도와야 하지만, “단체가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아니냐?”라는 멤버 중심의 생각이 들어온다면 그건 곤란하다. 주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소멸하겠다는 시퍼런 각오가 우리 안에 내내 살아 있어야 한다. 유지가능성 sustainability과 영속성perpetuity은 다른 얘기다. 전자는 책임감이지만 후자는 우상이다.


인터서브의 몸에 함께 하겠다는 것은, 보냄받음Missio즉 사도성에 대한 헌신이다. 아... 생각해보면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러하고 모든 교회들이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 함께 이 교회의 본질을 기억하고 지켜나가자.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자. 우리의 이 작은 몸짓이 전체 교회의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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