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느리게 걷기 캄보디아 껍플록 교회 이야기
이충국 선교사
캄보디아 껍플록교회 공동체에는 자신의 젠더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네 명의 지체가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여성의 복장을 하고 모임에 참석합니다. 이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필자가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나 거부감이 아닌, 그들의 미래에 대한 깊은 우려였습니다. 그들이 현재 가정과 학교, 그리고 캄보디아 사회 전반에서 감내하고 있는 고통의 무게보다, 앞으로 마주할 현실의 장벽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태국(‘카터이’)이나 캄보디아(‘크떠이’) 사회는 젠더 이슈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입니다. 생물학적 남성이지만 여성성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한 용어(크떠이, Kteuy)가 존재하며, 이는 역사적으로 궁중 무용수나 토속 정령 신앙의 무당(샤먼) 역할과 연결되어 독자적인 ‘제3의 성’ 범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사회가 특정 존재를 호명하는 ‘자리’와 ‘용어’를 마련해두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오랫동안 공동체 안에서 가시화되어 왔음을 시사합니다.  (자료 사진: 캄보디아 궁중 무용수)
이러한 문화적 수용성은 주류 종교인 상좌부 불교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성 정체성 문제에 대해 교리적으로 엄격하게 정죄하기보다, 유마경 제7품에서 "성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라고 설파하듯이, 현상의 비실체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현재는 과거 업보의 결과이며 다음 생의 업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세계관은, 현세의 다양한 삶의 양태에 대한 일정 수준의 관용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이 종교·문화적 관용은 사회적 현실과 심각하게 괴리됩니다. 가정 내에서는 폭력적인 교정의 대상이 되며,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합니다. 공무원 임용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일반 기업의 문턱 역시 극도로 높습니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극히 제한되며, 대다수는 소위 '어둠의 직업'으로 밀려나는 것이 캄보디아가 마주한 냉엄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교회가 그들의 사회적 미래를 책임지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줄 수는 없습니다. 또한, 복음의 이름으로 그들의 성 정체성을 '변화'시키려 시도하는 것은, 수많은 신학적 논쟁을 차치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적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복잡하고 정답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가 선택한 길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품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부터 그들이 교회에 올 때마다 한 명 한 명 안아주며 환대했고, 다른 지체들과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대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사랑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실천하자고 권면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성도들은 이 권면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 학교, 사회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매주 경험하게 된 이들은, 점차 교회의 주체적인 일원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댄스팀, 사진팀,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며 그들이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누고 있습니다.
 
🔼 댄스팀 🔼 주일학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1) 우리의 실천은 복잡한 신학적 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말씀에 기록된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사회에서 핍박받던 이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 학생은 전교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며 학업에 매진하고 있고, 다른 지체는 인테리어 회사의 마케팅팀에 당당히 취업하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변화시켰는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했을 때, 그 말씀이 생명력과 운동력이 되어 그들의 삶에 들어가 역사한 것입니다. 선교의 현장에서 씨앗을 뿌릴 때, 당장의 싹을 보고 싶어하는 조급함은 가장 큰 장애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면, 성령의 단비가, 말씀의 단비가 내릴 때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반드시 싹이 트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때가 다름에 조급해하기보다, 그들과 함께 '느리게 걷는 것'을 즐기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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