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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적 복음? 풍성한 복음?
Level 10   조회수 488
2022-04-22 14:43:54


 

원색적 복음? 풍성한 복음?

조샘 대표


  


"원색적인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한 교회의 선교 강의에서 관계와 상황의 중요성을 설명한 뒤에 질문을 받았다. 

  토요일 오후 ZOOM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80분씩 두 번, 중간 10분의 쉬는 시간 2번을 포함하면 총 2시간 50분. 일방적으로 한 강사가 얘기하고 듣는 이들은 받아 적는다. 청자도 힘들겠지만 내게도 정말 익숙지 않다. 양해를 구하고 포맷을 바꿔보았다. 25분씩 네 번의 세션으로 나누고 강의는 딱 한 시간 사십 분. 중간 중간에 휴식과 질의응답으로 시간의 여백을 두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을 잘 안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기다리면 질문이 나온다. 질문 나올 때까지 참는 것이 관건이다. 한번 물꼬가 트이면 깊이 들어간다. 대개는 팩트로 시작했다가 개인의 감정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왕성한 토론 시작되었고 많은 감동이 있었다. 결국 질의응답 시간이 부족해 10분을 연장했다.  한국 사람과 대화 중에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건 ‘통했다’라는 뜻이다. 감정이 풍부하고 다양한 한국인들은 속이야기를 나눠야 진짜 이야기를 했다고 느낀다. 그 강력한 힘은 한류를 만들어내고 일에 열정도 부어주지만, 때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를 방해하기도 한다. 감정선이 상하면 비즈니스도 어려워진다.  ‘다름’을 일단 힘들어한다. 그래서 공통점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내 얘기를 자기식대로 해석하며 자기 확증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청자의 Unlearn*을 위해서 서로의 ‘다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균형의 미묘함과 중요성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 나는 현재 한국이라는 사회에 보냄 받은 선교사 아닌가?

(* Unlearn: 과거의 지식과 습관을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


  원색적 복음. 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자매가 생각하는 원색적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겠어요?" 자매가 설명한 원색적 복음은 약간씩의 변형이 있으나 대강 이런 흐름이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셨다. 

2. 우리는 그 하나님을 떠났다. 

3.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태도와 생각과 행동은 죄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4. 그 문제를 해결하시려 예수님을 주셨다. 

5.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 연결되었다. 

6. 이 회복이 구원이며, 선물이기에 믿음으로 받으면 된다. 

7. 영접함으로 그 구원을 지금 이룰 수 있다. 


  이 내용이 순수한 복음, 원색적 복음일까? 성경에 이런 공식은 없다. 예수께서 전한 메시지에도, 바울의 서신서에도 찾을 수 없다. 복음임은 틀림없으나, 원본이나 순수는 아니다. 내게 익숙한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사실, 이 복음 전도의 내용은, 6~70년대 미국의 대학가에서 시작된 방법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 붐과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시기, 68혁명, 워터게이트와 반전 운동, 히피문화의 혼란 속에서 삶의 질문을 가지고 무언가를 찾고 있던 대학생들에게 답을 주려고 만든 것들이다. 80년대의 한국 사회, 기성세대에 의심을 품고 새로운 답을 찾던 청년들에게 이 정리된 복음이 대학생 선교단체 등을 통해서 들어왔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지역 교회에 전해졌다. 

  "예수님의 복음 전도가 이런 내용은 아니에요. 대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전하셨어요. 유대인들에게 전하니까요. 다윗의 왕국과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이 메시지가 쉽게 이해되었어요. 그러나, 바울의 복음 전도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거의 안 나와요. 복음이 혼잡해져서가 아니에요. 헬라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전하려니 다른 접근이 필요했던 거에요. 자매가 생각하는 원색적 복음과는 아주 다르죠."

  무슬림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원색의 복음을 선포하면, 당황한다. 그동안 "알라는 한 분이시고 아들이 없다"를 예배 때마다 기도로 올려드렸던 이들에게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 얘기를 하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건 불통이다. 그런 전도의 내용을 거절하기 힘든, 어려운 사정의 난민들에게는 이런 소식이 오히려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30년 동안 유대인이 되셨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알 수 있는 복음의 해석을 찾았다. 기업인이 되었건, 난민이든, 이 시대의 청년들이나 동성애자들에게도...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함이 먼저다. 그래야 그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다. 왜 그렇게 복잡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내 대답은 심플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삶 전체를 투자하고 기다리며, 한번 영접이면 끝나는 생산이 아니라, 오랜 관계를 통해서 거듭 나누어지는 회심의 복음을 전하셨다. 대량 생산이 되지 않는 이 전도의 미련함. 예수께는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사람을 대하고 관계를 맺고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방식이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과 태도 즉, 제자도가 분리되지 않으셨다.


  2022년 한국에 나는 선교사로 서 있다.  계속되는 분단 상황과 그 상황이 만들어낸 좌와 우, 세대 간의 갈등,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 가운데 내가 전할 복음은 무엇일까? 또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만이 원래의 복음이라고 믿으며 헌신하는 교인들 가운데 나는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 이성적인 변증보다 감정적 교류가 더 중요한 이 사람들과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방법은 무엇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나, 생각해보면,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이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복음을 살아내는 방식인 제자도는 구분되지 않았다. 이 고민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던 제한적 복음의 틀은 깨어진다. 그리고 그전에 몰랐던 복음의 신비가 새롭게 드러나고 확인되고 증거된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 17). 복음을 나누려는 열정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발견하게 한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삶과 언어를 통해서 놀랍게도 이 지혜와 계시의 빛이 내 안에서, 또 이 사회의 어두움이 빛나기 시작한다. 복음을 나눔과 복음을 발견하는 제자도는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다.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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