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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다 미션얼 피플_로잘린 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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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3 10:16:56


‘Aayi(엄마)’ 로잘리 하비 
* Aayi : 엄마, 인도 중서부 지역에서 쓰이는 마라티어


1882년 제나나성경의료선교회(ZBMM, 인터서 브의 옛 이름) 역사 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한 선 교사가 인도로 파송됩니다. 그 이름은 로잘리 하비Rosalie Harvey . 그녀는 1854년 영국 서식스 씨포드의 작은 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82년 인도로 파송되어 첫 2년을 푸네에서 보낸 후, 나시크에서 평생을 한센인의 친구로, 고아들의 어머니로, 동물보호론자로 살다가 1932년, 50년간 의 인도 생활을 마감하고 소천하였습니다.



필요에 반응하다 

- 남녀공학 학교와 동물병원

1884년 나시크로 이동한 로잘리는 바로 남녀공학 학교를 세우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ZBMM 선교사들은 여성 사역에 집중하였기에 로잘리의 남녀공학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현지의 필요를 보고 이에 응답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그녀는 여자아이들뿐 아니라 남자아이들의 교육도 절실한 이 지역의 필요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녀와 동료들은 이런식으로 여러 학교를 세워 운영하 였습니다. 


하루는 로잘리가 나시크의 길거리를 지나는데 한 여성이 다리가 셋인 암소를 심하게 매질하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하다가는 암소가 얼마 못되어 죽겠다는 생각에 매질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날 장애가 있는 동물의 고통을 보게 된 로잘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그 어떤 생명체라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운영하던 미션 홈에서 임시로 동물치료 센터를 시작하였습니 다. 마침내 1895년, 그녀는 수의사가 아니었음에도 동물병원을 개설하게 됩니다. 창조 세계 돌봄이 21세기의 시각으로는 공감 가는 행동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에만 한정되었던 시대에 로잘리의 행동은 매우 앞서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동물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며, 창조 세계를 돌보는 사역을 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근과 전염병의위기는 또 다른기회를

- 구호사업과 고아원

189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약 20년 동안 인도에서 기근과 전염병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특히 로잘리가 사역하는 서부 인도가 가장 큰 피해를 당했습 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사餓死하거나 전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정부에서도 구호 위원회를 만들어 지역마다 구호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호위원으로 이 활동을 주도하던 로잘리에게 버려지는 아이들 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선교센터에 아이들을 버려두고 가거나 직접 아이를 맡기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을 위한 조직적인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려졌지만, 하나님께서는 로잘리를 통해 그들을 건지신 것입니다.


지방 정부에서는 그녀의 구호 활동을 치하하며 명예 실버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차가운 메달보다 오히려 불독 강아지를 선물로 주었으면 더 좋겠다고 일기장에 쓸 정도로 명예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우리는 당신을 더 이상 여자로 보지 않고 남자로 여깁니다”라는 인도 남성들의 말에 매우 기뻐했습니다. 당시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심각했던 인도 사회에서 이 말이 얼마나 큰 무게를 담고 있었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 한센인 사역

나시크 힌두 사원 근처에 모여 살던 한센인들은 자주 로잘리의 미션 홈에 방문 하여 구걸하고 때론 미션 홈 부지에서 기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시적 구호가 아니라 조직적인 돌봄이라는 것을 깨달은 로잘리는 1898년, 한센인 사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구호사업을 하다가 또 하나의 사역의 필요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가 바로 기근과 전염병으로 온 인도가 극심한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였고, 로잘리 또한 지방 정부의 요청으로 구호 활동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그 위기를 기회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었습니다. 한센인들의 필요를 더 크고 강하게 느낀 그녀는 이들을 위한 일을 실행하였습니다. 


기근과 전염병을 거치며 1903년엔 100명 이상으로 불어난 한센인들을 위해 로잘리는 병원과 학교, 집 등을 갖춘 홈을 만들기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상당한 재정이 필요했지만 안타깝게도 ZBMM 영국 본부에는 이 사업을 후원할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러 방법을 통해 재정모금 운동을 벌였지만, 재정은 매우 느린 속도로 채워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변 힌두인들은 기독교 선교사가 한 센인들을 개종시키려 한다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고, 기독교인들은 극소수의 한센인만 회심했다는 것으로 선교사의 활동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황에서 로잘리는 본인의 사역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우리의 일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의 고통을 치료하고,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말해줌으로 미래의 고통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그들의 귀를 여시고 진리를 그들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하실 수 있습니다.”



50년 사역의 유산 

- ‘Aayi’(엄마)

로잘리는 50년 동안 인도 사역을 통해 사람을 얻었습니다. 로잘리의 가장 큰 유 산은 그녀를 통해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인도인들로부터 ‘Aayi(엄마)’로 불렸습니다. 한센인을 위해 헌신한 그녀의 삶은 그들에겐 엄마로서, 친구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로잘리는 한센인 홈이 완공된 후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나의 능력치를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치를 뛰어넘지 않는 선에서”.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역자였다 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보는 영적인 눈 또한 하나님을 의지 하는 삶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코로 나 팬데믹 위기를 기회로 볼 수 있게 도전합니다. 


그녀는 대중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50년의 인도 사역 중 단 한번 11개월의 안식년을 보냈습니다. 영국 본부에서 해마다 로잘리에게 안식년을 가질 것을 종용했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본국에 방문하여 후원자들과 교회들을 방문하여 마치 영웅처럼 자신의 사역을 보고하는 것이나 청중들로부 터 받게 될 칭송 등이 너무나 거북했던 것입니다. 선교사의 책무 측면에서 그녀의 행동은 현시대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영웅주의 시대에 비 영웅이 되고자 했던 겸 손하고 현지화된 그녀의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충분히 귀감이 되고도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원칙을 상황과 필요에 잘 맞추며 살았습니다. 남녀공 학 학교를 세우고, 아무도 관심 없던 동물의 아픔에 응답하는가 하면, 철저히 소 외되었던 한센인의 섬겼으며 기근으로 버려진 고아들의 필요를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의 필요를 보았던 참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로잘리 하 비의 삶이 위기와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선교적 울림을 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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