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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으로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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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17:28:04
 

난민으로 오신 예수님



조샘 대표



아프가니스탄 난민 378명이 826일 한국군 수송기를 타고서 인천공항에 입국했습니다. 이 며칠 간의 과정 가운데 저는 많은 우려를 했습니다. 2018년 제주도에서 예멘 내전으로 인해서 500명이 난민 신청을 했을 때, 사회 전체가 들끓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이번 아프간 난민 400여 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데다, 대선 정국인 것을 생각한다면, 정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 부분에서 정치가들과 언론이 지혜를 발휘해주었습니다. 이들을 "난민"으로 프레임 하지 않고, 우리 한국 정부와의 조력자로서 이들을 구출하는 것으로 공식 발언을 한 것입니다. 놀라운 말의 힘입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환영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정부가 위기 상황의 긴박함으로 고려해서 신속하고 조용하게 처리해 준 것도 놀랍지만, 여당의 송영길 대표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해준 것이 감사했습니다.

 

난민은, 본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재해나 전쟁 등으로 인해서 떠돌게 된 나그네들입니다. 전 세계 난민은 이제 1억에 육박합니다.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 가운데, 약소국 내에서 발생하는 내전이나 국가 간의 국지전은 늘 발생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재난과 가뭄 역시 기후변화와 함께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가운데, 난민은 금세 해결할 숙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글로벌 현상이며, 선교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는 국제 난민 협약 국가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난민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제주도 예멘 난민 500명 신청자 가운데 단 두 명 만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매년 수천 건의 지원이 있으나 실제 받아들여지는 것은 1%가 되지 않습니다. 202012UN 난민기구에서 조사한 서베이에서 국민 중 난민 수용 찬성은 33%에 불과했고, 53% 가 반대를 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의 경제적 부담이 싫다는 이기적인 이유였지만, 이슬람권의 모든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생각하는 이슬람 포비아도 큰 몫을 했습니다.


독일과 캐나다는 수만 명 규모의 난민을 공식적으로 받을 뿐 아니라 사회정착 시스템을 가동해왔습니다.  터키, 그리스, 말레이시아, 레바논, 요르단 등의 나라들도 수만 명의 난민을 받아 캠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난민에 대한 우리나라의 태도는 많이 아쉽고 더 안타까운 것은 이슬람 포비아를 확산하는 이들이 종종 크리스천들과 교회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는 셈이니, 이번에 들어온 아프간인들을 어떻게 환대하고 도울지가 우리에게 학습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정이 많고 이웃을 환대하는 한국 고유의 정서를 생각한다면, 이런 변화가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 이집트에서 정치 난민으로 지냈습니다. 야곱의 가족 역시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으로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뿐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간기뿐 아니라 신약 이후 전 세계에 흩어져 난민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조차 모여서 산 날만큼 난민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구약의 많은 구절은 나그네를 어떻게 환대하는지를 하나님 백성의 중요한 윤리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2007년 우리 크리스천 청년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피를 흘렸던 땅입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아프가니스탄이 우리에게 다가온 건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아프간 선교의 문은 닫혔습니다. 무리해서 찾아가려던 이들이 이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강도당해 죽어가는 이에게 선한 이웃이 된 사마리안의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난민과 같이 극심한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시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 우리는 강자나 시혜자가 아니라, 약자로서 이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든 선한 이웃이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당시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쟁으로 인한 비극과 가난을 경험했고, 이 어려움 가운데 5백만 명의 사람들이 근대사에 전 세계에 흩어져서 디아스포라로 살아왔습니다. 이들을 무슬림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보며, 마음을 함께함이 남을 도움에 가장 중요한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어려움을 겪는 이들 중심으로 사고함이 중요합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였습니다. 누가 이웃이고 누가 아닌가를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가 이 강도 맞은 자의 이웃이겠는냐?”라고 되묻습니다. , 피해자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여당의 발표에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 난민들을 한국 정부의 조력자로 소개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에 돌아가기가 어렵게 된 점입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때가 되면 고향으로 가고 싶을 것입니다민족주의가 강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정서 가운데 점령군의 조력자라는 낙인은 이 귀환에 오랫동안 어려움을 줄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 총체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강도만난 이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치료입니다. 그리고 장기간 머물 수 있는 피난처가 요구되며, 여비도 필요합니다. 이번에 들어온 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동안의 환대가 아니라, 이들 가운데 장기로 있기 원하는 사람들의 정착이며 다양한 필요들이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강도당한 이를 돕지않고 피해간 두 사람으로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든 것에는 깊은 함의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부정한 시체가 될 수도 있는 이 죽어가는 사람을 피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맹목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이슬람이나 불교 등등 종교로 이해해왔고 전도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어려운 이들을 도울 때 오히려 방해가 되는 프레임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전도의 대상이기 이전에 강도 만난 이웃입니다. 이번 난민들은 어린이부터 여성, 노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한명 한명이 한 인간으로서 총체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대화의 시작은 율법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심으로 대화를 마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의 구원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 구원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고 믿음으로 사는 것 만이 남아있습니다. 교회 이름으로 외적인 성명을 내거나 일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난민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동행하는 구원의 비밀을 함께 생각하고 발견할 때입니다. 이 구원의 얘기를 함께 나눌 크리스천들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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