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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은 나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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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3 17: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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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선교사



   방과 후, 아이를 데리러 학교 마당으로 들어선 나에게 활짝 웃는 얼굴로 아이의 반 친구 엄마가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A를 처음 만난 날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미 세 딸이 있지만 아이들을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며 부른 배를 내밀었다. 가식 없이 솔직한 A에 너무 호감이 갔다. 그 후 우리는 학교에서 마주치면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 P국의 경제 이야기 등 끝이 없는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어느 날 A의 생일에 초대받았다. 그곳에서 여러 명의 P국의 여성들을 소개받았다. A의 친구들은 겉모습이나 이슬람 종파를 가리지 않고 서로를 여성과 엄마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건지! P국에 온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나에게 이슬람 땅에서 이렇게 잘 까부는 아줌마들을 만나게 된 것은 마치 꿈같았다. 


친구들을 만나고 P국의 사람들과 문화를 알아가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사실 그당시 나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 심각한 빈부 격차를 보면서 깊은 무기력감과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나는 왜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가? 아직 내 아이들은 어린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뭘 하는 걸까? 끝없는 생각들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어 E2S 동기인 영국 선교사 부부에게 마음을 털어놨고, 그들은 J국에서 매일 밤 9시에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리틀 덩키 자선행사

   어느 날 친구 Y가 나에게 그림을 친구들에게 그냥 나눠주지 말고 팔아서 용돈을 벌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으로서 이곳에 살면서 사람들의 많은 친절과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 사회에 돌려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나의 생각을 나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작은 도움이라도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친구들과 나의 고민을 나누던 중,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행사를 준비하며, 이를 통해 친구들과 가까워지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행사를 준비하며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Y와 나는 장소를 물색하다 A의 생일에 만난 S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했다. 그녀는 폴로경기장 안 잔디에서 노천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몇 명의 사람들과 자선행사를 할 때 카페의 테이블을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한번 밖에 만난 적이 없었지만, S는 흔쾌히 그녀의 카페를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나는 자선행사에 함께 뜻을 모을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젊은 예술가들, 여성 인권 보호, 일자리 창출을 위한 NGO, 동물보호단체, 어린이 인권 보호 등 여러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부분 기부자보단 기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첫 리틀덩키 자선 행사는 드넓은 잔디 카페에 6개 테이블로 작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Y의 친구들이 멕시코에서 가져온 선인장, 피나타와 유리공예품들, 스위스 친구의 바느질 공예품, 한국 선교사님이 기증한 수제 리본 공예품으로 풍성했다. 나는 동갑내기 사촌 N이 준 용돈으로 중고 시장에서 중고 물건들을 사서 리사이클 공예품을 만들고 아크릴 물감으로 P국 풍경화 등을 그려 내놓았다. 한인회와 P국 사람들 등 100여 명의 방문자들이 다녀갔다.


A의 생일에서 만난 몇 명의 친구들도 첫 리틀덩키 자선행사에 와주었다. 우리는 그 후 S의 카페나 A의 집에서 자주 만나 차와 음식과 함께 삶을 나누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자신의 가치나 생각들을 나누는 것을 즐거워했다. 종족도, 무슬림 종파도, 아이들 학교도, 사는 정도도 달랐지만 우리는 여성, 아내, 엄마, 전문가 그리고 신을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각자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S와 F가 나에게 다음부터는 자신들이 홍보도 하고 조직도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기뻤다. 그 친구들이 이끈다면, 나는 그저 성실한 참여자가 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몇 달 후 두 번째 리틀 덩키 자선 행사가 열렸다. F와 S는 마치 이런 일을 해왔던 사람처럼 행사를 준비했다. 덕분에 나는 온전히 나의 부스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많은 물건을 만들고 그림들을 그렸다. 아끼던 가죽으로 필통도 만들었다. 주변에 사는 주재원 언니도 같이 물건을 만들어 주셨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 미국인 선교사 B가 손수 짠 니트 옷들을 기증했다. 그 후 B는 꾸준히 손수 짠 옷들을 자선행사 때마다 기증해주었고 가장 인기가 많았다.


두 번째 리틀 덩키에는 여성들의 일자리 제공을 위한 수공예 NGO들, 인권 보호, 동물보호, 환경 NGO 등뿐만 아니라 이윤을 목적으로 한 카페나 레스토랑들도 참가했다. 우리는 NGO 들에게는 소액의 테이블 사용료만 받았고, 이윤을 목적으로 온 참가자들에게는 기부금 명목으로 장소 사용료를 많이 받았다. 어떤 업체는 따로 더 기부하기도 했다. 나는 내 부스의 판매 금액을 반으로 나누어 이슬람 고아 학교와 기독교 학교에 기부했다. 리틀 덩키를 주최한 F와 S는 모든 기부 금액을 모아 자신들이 기부하고 싶은 학교와 단체에 기부하였다. F는 나에게 소개받은 가난한 기독교 학교에서 양말이 필요하다고 하자 양말 500켤레를 말없이 건네주었다. 그 이후에도 F는 남몰래 매년 그 학교에 양말을 600켤레씩 보내주고 있다고 학교 담당자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내어주는 이런 모습이 바로 내가 보았던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무슬림 친구들이었다.


리틀 덩키 프로젝트

   나는 돈을 받지 않고 비정기적으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그런데 미술을 배우던 아이들의 어머니들에게 레슨비를 받고 정기적인 레슨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주변 무슬림 친구들이 권하는 것을 수렴하며 작은 일들을 진행하곤 했다. 기존의 선교 사역 형태와는 상이하고 대단한 전략도 없다. 더구나 권유와 제안을 받고 나면 열심히 계획하고 준비하는 성격이다. P국에서 어린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로서 녹록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아주 즐겁게 시작되었다. 비록 우리 가족들은 한동안 물감이나 미술 재료들이 덜 지워진 테이블에서 밥을 먹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새로 이사한 집에는 작은 방 하나를 아트 스튜디오로 꾸며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날의 감사와 기쁨은 아직도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리틀 덩키 프로젝트는 미술 교실 아이들에게 받은 레슨비에서 재료를 구입하고 남은 돈으로 우유와 비스켓 등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P국은 신호등이나 도로에서 서서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다. 돈을 주는 것은 그 아이들의 뒤에서 수입을 챙기는 범죄자들을 돕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제대로 끼니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신호등 앞에서 창문을 열어 우유와 비스켓을 나눠주었다. 처음 나의 레슨에 학생들이 오면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차에 우유 박스들과 비스켓 박스를 실어주며 망그네버째라고 불리는 구걸하는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 나눠주라고 이야기했다. 그것을 받은 부모님들은 자신들도 지속해서 우유와 비스켓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넌 미술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웃을 돌보는 것도 가르치는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이 외국인인 내가 하는 것이 신기했던 가보다. 어떤 엄마는 왜 외국인인 네가 우리나라 사람을 돕냐고 물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미래가 될 텐데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조금이나 돕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나의 미래의 일부가 될 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야 나중에 건강한 어른으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한국에서 이 사역을 위해 따로 재정을 준비하거나 후원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나는 P국 부자들이 자기 사람들을 도울 힘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말없이 자신의 차에 우유와 비스켓을 싣고 다니기 시작했다.


2017년 여름 산악지역에 있는 학교로 사역지를 옮기기 전까지, 크고 작은 자선행사를 통해 친구들과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며, 미술 레슨을 통해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차로 6시간 떨어진 산악지역으로 이사 갔지만 S는 꾸준히 우리 가정을 방문했고, 겨울 방학에 라호르를 방문하면 A와 친구들이 매년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다. 한국에 와 있는 지금도 친구들과 채팅방에서 서로가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하며 지낼 수 있어 감사하다.


사실 우정을 쌓아가던 두 친구와 미술 교실의 한 어머니에게 깊이 있게 예수님에 대해서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구속과 구원, 십자가와 부활, 성령님에 대해서 그들이 질문을 했고 나에게는 대답할 기회들이 주어졌다. 그때마다 성령님은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 친구가 보내준 차 안에서 얼마나 기도하게 하셨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특별한 만남들은 늘 나의 의지와 계획과 상관없이 일어난다. 우정과 만남 속에서 그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을 듣게 하셨으며 그들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물어보게 하셨다. 또한 내가 갈 바를 몰라 헤맬 때도 주님은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리틀 덩키 프로젝트도 시작하셨고, 방법을 가르치시고, 격려해주셨다. 친구들과 그들의 남편들과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든든한 조언가와 조력자가 되어준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늘 고마운 마음이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작은 나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등에 모시고 P국을 두루 다녔다. 지금도 그분이 일하시도록 나는 그저 그분이 가자는 곳으로 나의작은 믿음의 발걸음을 옮긴다. 그분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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