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 영성
송 율 선교사
결혼한 지 7년 만에 첫아들을 낳았다. 긴 난임의 시간을 보내고 낳은 아이라서 그런지 몸은 힘들었지만 기쁘고 소중했다. 산후조리원에 누워 모유 수유할 때 퇴근을 한 남편이 들뜬 목소리로 내게 통보했다. “우리 이제 곧 아부다비로 갈 거야. 학교에서 오퍼를 받았어!” 남편의 들뜬 계획은 마흔 줄이 다 되어 초산 한 나와는 상관없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이 핏덩이 같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재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과제였기 때문에 신경이 온통 아이에게만 쏠려 있었다. 3개월이 지나 아이가 백일쯤 되었을 때 남편은 선교를 떠나기 전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고 싶다며 혼자 이스라엘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의 원대한 꿈, 10년 넘게 준비하며 꿈꾸던 중동 선교에 대한 비전을 알기에 야속함도 잠시, 선교지로 떠나기 전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돌아오길 바랐다. 나는 여전히 갓난아기와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아이가 뒤집기를 할 때쯤 나는 아이와 아부다비로 밤 비행기에 올랐다. 남편은 한 달 전에 미리 아부다비로 출발하여 현지 적응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아부다비 땅을 처음 밟았다. 5월 초였음에도 불구하고 찌는듯한 더위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의 뜨거운 햇살은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의 보금자리 주변은 아무것도 없어서 삭막함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나무나 풀이 있는 들판은 있고 건물이 없다는 의미인데 이곳은 정말 모래뿐이었다. 나무도, 풀도, 들판도 없는 모래사장 같은 곳에 학교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캠퍼스 기숙사에서 아이 이유식과 남편의 세 끼 식사를 만들었다. 요리에 서툴렀던 나는 남편 삼시 세끼와 아이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하루 6시간가량은 음식을 만드는데 보냈다. 식품을 사기 위해 장을 보려면 17km 떨어진 곳에 있는 쇼핑몰에 가야 했다. 물론 좀 더 가까운 곳에 작은 슈퍼가 있지만, 죄다 고급 슈퍼들이어서 식자재를 사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아부다비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 시작된 첫 라마단은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로 기억된다. 너무 더워서 유모차를 끌고 아이스 커피를 한 잔 사서 매장 밖으로 나갔다가 음식을 외부로 가지고 나갔다며 덩치가 큰 남자 직원이 호통치며 눈을 부라렸던 그 모습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렌터카에 바퀴벌레들이 기어 다녀 기겁하던 일,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 온몸을 검정 아바야로 가린 현지 여성들은 왜 그렇게 무섭게 보이던지. 검은 물체가 슬슬 지나가는 것을 볼 때 소름 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외에도 지면에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현지 적응 수난 이야기들이 있다. 현지에 도착하면서 나는 조금씩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부다비 여름은 섭씨 50도를, 겨울에도 20도를 웃도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욱 추워졌다. 너무 추워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느낀 강력한 한파였다. 나를 이렇게 추운 곳으로 데리고 온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 역시 나처럼 한파를 보내고 있었다. 하나님 사랑하여 복음 전파의 비전을 꿈꾸며 진입 장벽이 높은 창의성 접근 지역인 걸프 지역까지 왔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고, 우리는 영적 육적으로 모두 피폐해져 갔다. 영적으로 갈하여 죽기 직전까지 가면 하나님은 소량의 단비를 내려주셔서 겨우 목을 축일 수 있게 해주셨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 생존했었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소리치며 화도 내봤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생각해왔던 선교사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괴리감은 더욱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프랑스에 학회가 있다며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없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 인생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떼제 공동체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떼제 공동체에 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짧게라도 깊이 누리고 싶었다. 떼제 공동체를 방문했지만, 나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만 2세 아기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셨다. 예배 도중 한 찬양으로 주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것 같았다.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우리는 이 찬양을 부르며, 우리를 기억해주시기를 기도했다. 선교지에서 멋지게 사역의 열매를 내기보다는 헛발질하며 생존에 급급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보잘것없는 비지떡 같은 우리의 인생을 기억해주시기를 찬양을 부르며 올려드렸다. 찬양을 부르며 남편과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주님은 그때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다 안다.” 내가 주님께 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임을 알았다. 주님께서 나를 알아주시는 것. 겉으로 보여지는 결과물과 어떠함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 하나로 선교를 갔고, 그 마음으로 죽도록 힘들지만 버텨내고 있는 그 삶을 주님은 아신다고 하시니 그 어떤 위로보다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떼제 공동체를 떠나기 전날 오후, 마지막으로 solidarity
garden에 들렀다. 남편이 내게 20분의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해준 것이다. 추워서 그 정원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강경한 요구로 마지 못해 정원으로 향했다. 3월인데도 유럽 한파가 닥쳐서 추웠다. 초록 잎을 보고 싶었는데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노라니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막에 사는지라 초록이를 항상 그리워하는데, 이때라도 좀 봤음 좋겠구만 왜 하필 유럽 한파냐 투덜거렸다. 앙상한 나무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땅을 내려다보고 걷고 있었다. 남편이 내 준 숙제를 어서 끝내고 따뜻한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 내면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앙상한 나무를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참 볼품없어 보였다. 너무 메말라 보이고 쓸모없이 보였다. 나는 주님께 이렇게 생긴 앙상한 나무는 너무 싫다고, 풍성한 잎을 지닌 나무들이 보고 싶다고 아뢰었다. 나의 이런 반항 섞인 기도에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이 앙상한 겨울나무는 내가 허락한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힘들고 모진
추위 속에서도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잎을
다 떨궈내고 처절하게
버티는 이 나무를
통해 나는 영광
받는다. 인생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기
마련인데, 항상 나뭇잎이
창창하고 우거진다면 그것은
비닐하우스에 있던지, 가짜 나무일
것이다. 나뭇잎을 다 떨구어 내며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겨울나무는 자신의 본연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겨울나무를 기뻐하노라.” 내면에서 울리는 주님의 음성은 나의 비진리를 깨닫게 하셨다. 사역자로 살아온 내게 항상 푸른 잎과 열매를 내는 나무로 살아가야 한다는 비진리의 사슬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영적인 겨울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중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서바이벌 하는 그 자체로 주님은 기뻐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영성가 잔느귀옹 역시 ‘영적 성장 깊이 체험하기’에서 비슷한 음성의 내용의 글을 접하게 되면서 주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당신이
영혼의 순례 길을
걷고 있다면, 재앙을 당하거나
메마른 건기가 계속될
때, 사람들이 영적인
겨울이라고 부르는 때가
찾아올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생명은 계속
그 자리에 있다. 겨울이 와도 말이다.” (잔느귀용, ‘영적 성장 깊이 체험하기’ 중에서) 그리고 주님은 겨울나무 안에는 여전히 생명이 있어서 봄이 되면, 그분의 때가 되면 자연스레 잎과 열매가 맺혀진다고도, 그러기에 봄을 기대하며 감사함으로 버티라는 마음도 주셨다. 필드로 나간 지 2년 만에 그간 힘들었던 나의 삶이 겨울이었음을, 죽지 않기 위해 버티고 버틴 그 삶을 주님께서 기뻐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겨울나무의 영성을 배우는 데에는 긴 시간을 거쳐야 했다. 프랑스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바로 봄은 오지 않았다. 겨울은 겨울이었다. 여전히 춥고 힘들었다. 너무 추운 강풍으로 남편은 신장암에 걸려 수술을 하고, 아들은 입을 뗄 수 없어 언어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도 있었다. 참 추웠다. 그러나 그 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는데, 우리가 주님의 섭리 안에 머무르고 있기에 봄을 기다리는 소망이 생긴 것이었다. 이상화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슬픔으로 시를 맺었지만, 내게는 들을 빼앗겨도 봄은 오리라는 믿음과 소망이 생겼다고나 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겨울나무 영성은 내 삶에 깊이 흔적을 내며 파고들었다. 그래서일까. 고단하고 수난의 삶을 겪은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던 나의 겨울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으며 눈물 흘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로 얼룩진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못했다며 자책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겨울을 지낼 때 삶을 살아내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8-19)
내가 기대했던 선교지의 삶은 아니었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그것이 기분 좋은 일이든, 슬픔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분의 일하심 가운데 우리가 머물러 있는 그 자체가 감사하다.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조금씩 신뢰가 쌓인다. 가장 더운 나라에서 겨울나무의 영성을 가르쳐주신 그분의 능력이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서 보내신 땅에서 그분을 향한 신뢰와 행하실 일들에 대해 기대함으로 살아간다. |